연구 분야에 관한 한(恨)
박사과정까지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소 억울한 점은, 원하는 분야의 연구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계공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도 기계공학과로 진학하였는데, 막상 주어진 일은 머신러닝과 통계분석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사실 좀 황당했습니다. 심지어는 기계공학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순수 재활 의학과 관련한 것이었으니 진로도 막막했습니다. 공학 석사인데 석사 2년 하는 동안 단 한번도 기계를 만질 일도, 기계를 제어하는 코드를 만질 일도 없었으니까 기업 리크루팅에서도 할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뭘 할줄 아냐고(물론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진 않습니다만) 기업 담당자가 물어보고 석사때 해본 것을 대답하면 대부분 1차적으로 제가 하는 일이 뭔지 모르고, 기업입장에서 공학자로서의 저를 뽑을만한 매력이 없다는 것을 처참하게 느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느끼실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융복합 연구거나 교수님이 본전공과 관련 없는 연구나 과제를 하게 되면 연구실에서 누군가는 그 연구 주제를 위해 희생되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일부 교수님들은 '석/박사라면 처음 해보는 일이더라도 논문 찾아가면서 만들어 낼 줄 알아야지'라고 생각하시면서 아무 주제나 가져오기도 합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연구거나 기초 지식이 없더라도 짧은 시간 내에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무능하다고 낙인찍는, 굉장히 나쁜 마인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리해본 단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 교수님은 그런 나쁜 마인드를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ㅎㅎ)
1. 주변에 도움 받을 사람이 없다. 교수도, 연구실의 다른 대학원생들도 내 연구주제를 모르니 잘못하고 있어도 아무도 조언을 해줄 수 없다.
2. 이상한 조언, 억까를 듣는 경우도 많이 생길 수 있다.
3. 1, 2로 인해 성장과 성과가 더디고 진로 선택에서 불리하다. 석/박사를 해놓고 전공과 다른 분야로 취업해야하는 상황. 그러면서 관련 전공자들과 경쟁해야하는 불리함.
석사 1기 때에 리크루팅 부스를 돌아보면서 연구 주제에 많은 회의감을 느끼고 진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를 진학한 지금, 제가 느낀 것들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흐름에 최대한 빨리 편승하기
저는 공학자가 되고 싶었고, 로봇을 설계하고 제어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보통 연구실에서 듣도록 권하는 수업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졸업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연구나 진로에 도움이 될만한 타 전공의 수업이나 교육을 찾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실적을 채우기 위해, 타학과에서 열리는 캡스톤디자인프로젝트에 참여해서 특허 실적을 채웠습니다.
무시할 용기
앞서 언급했듯, 저는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다보니 발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전혀 다른 방향의 질문이나 조언을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처음엔 그 분들의 방식으로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해봤고, 그 조언들의 의미를 따라가보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연구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다 수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받은 지적은 내용의 전개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역학, 의학 기반의 연구만 해오신 교수님께 데이터 기반 분석 방법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수님의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것 대신에 다음의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1. 원래 이 분야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참고문헌 여러 개 쌓아서 보여주기
2. 결과가 나올 때까지 코멘트를 무시하고, 결과로 보여주기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교수님이 시키신 방법이 틀린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내서 방어해내야겠지만, 그러기엔 지식이 정말 너무 많이 필요합니다. 1의 방법이 석사 초년차가 할 수 있는 차선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1.도 많이 썼지만 2.의 방법을 주로 써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지 결과까지 나쁘고 늦게 나왔으면 어떻게 됐을지 좀 무섭습니다.ㅋㅋ)
결과를 만들어주지도 않을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휘둘리다가 일반적인 방식을 벗어나버리면, 그 결과는 온전히 본인에게 지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본인의 실적과 진로로 나타납니다. 그 분야를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의 조언보다는, 공부하고 있는 본인의 지식을 제일 믿어야 합니다.
지적받을 용기
그러다 보니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안하니까요..ㅋㅋㅋㅋ 교수님께서 잘 모른다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놔두시는 경우에는 지적받을 용기는 필요하지 않을 지 모르겠습니다.
과제가 껴있고, 성과를 내야하는 상황이면 교수님은 진도를 체크할 수 밖에 없고, 그런 경우가 아니어도 연구를 소홀히한다고 오해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주제를 맡겨놨다면 진도가 느린걸 감안해주실 수도 있지만, 사람은 원래 자기가 안해본 경험을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수님은 진도가 느리다고 혼내실 수도 있습니다. 혼나고 지적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공부하고 있는 것들과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로드맵을 교수님께 공유드리길 추천드립니다. 그래야 교수님이 오해를 풀 수 있고 교수님도 진도가 안나가서 생긴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들고 힘든지, 그리고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 보다는 나은 것임을 최대한 어필하시는게 좋습니다.
맺음말
쓰다보니 좀 두서없고, 제 교수님과 연구실에 대해 너무 나쁘게 쓴 것 같기도 하네요..ㅋㅋ 실제로 그렇게 나쁘진 않습니다. 교수님이랑도 잘 지냅니다.
석사 초반 처음으로 연구실을 들어가면, 자기가 싫은 주제거나 전혀 모르는 주제라도 교수님께서 시키는 주제를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시키는 방법들을 거절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교수님도 모든 것을 다 아실 수는 없는 만큼, 교수님이 잘 모르는 분야를 할 때에는 교수님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교수님의 경험을 존중하며 자신의 주관을 죽이고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된 후에 결과가 나쁘면, 결과도 나쁘고 과정도 일반적이지 않은 총체적으로 모든 게 나쁜 연구가 됩니다.
그렇다고 아무 근거 없이 교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라는 의도는 아닙니다. 코멘트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갖춘 후에,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어떻게 교수님께 이해시킬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연구 과제에 대한 책임은 교수님께 있지만, 그래서 교수님의 말씀을 많이 따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결국 진로를 제 전공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게 되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학부때 쌓아온 지식이 무시할 만큼 가벼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것 때문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지 못할 정도도 무거운 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과 본인이 전공하시지 않은 분야를 굳이 연구하진 않으셨음 좋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할 지라도 스스로를 믿고 담대하게 도전해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원생의 짧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학한 전공과 다른 연구 분야를 연구하게 될 때 (2) (0) | 2024.11.04 |
---|---|
대학원생으로 자격증 따기 (1) | 2024.08.28 |
대학원생의 장/단점 (1) | 2024.08.27 |
대학원 면접 질문들 (0) | 2024.08.25 |
대학원 진학이 고민될 때 (0) | 2024.07.06 |